상월원각대조사 법어의 시작
“實相은 無相이고”
실상은 우주만유의 존재로서 참 모습을 규명해 보면 물질적인 존재는 그 인연에 따라 머물다가 결국 그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어 궁극에는 텅 비워져 한 물건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이라 하는 것이며, 실상무상은 이 세상의 근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수학, 천체물리학을 비롯한 현대과학은 양자물라학 시대에 이르러 철학과 만나고 있다. 우라기 살고 있는 인간 세계에서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깊이와 넓이를 인식해 왔다. 과학적인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현상을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것인데, 인간이 과학으로 접근한 작은 세계는 양자의 경계면에서 논리적 한계에 빠진다.
언젠가는 그 한계가 보일 듯 했지만, 작은 세계안에는 큰세계의 논리로는 또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자물리학의 실험적 결과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과학자들은 물질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많은 표를 얻고 있는 논리는 끈의 이론이고, 우주는 7가지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 수학으로 풀어내는데 까지 이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7가지의 세계는 수학적으로 보인 세계만을 의미할 것이고, 구체적으로 그 세계가 어떤 전체 영역에서 분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양자관찰에서 입자 또는 전자가 불규칙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 과학에서 불규칙하다는 것은 인간이 그 현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을 한때는 통계적인 해석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 모든 가설과 궁금증은 사실상 아인쉬타인 시대쯤 부터 시작했다고 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연구와 노력은 단지 과학만의 영역은 아니다. 환경과 언어가 현재와 다른 고대 또는 더 오랜시절에는 단지 그 궁금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꼭 현대에 와서야 알게 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인간계가 유일무이하다고 무의식중에 믿고 있는 사람들은 믿고 있다기 보다도 알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공상과학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유일무이한 증거는 현대 과학이 본 적이 없다. 그냥 모를뿐이다.
혹시나 우주의 원리를 깨닫았다는 부처는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기에 깨닫았다하고,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는가?
내가 부처라고 해도 참 설명하기 어려운 일일 것 같다.
부처라는 경지가 있다는 전체를 두고, 생각해 볼까? 수년전만해도 양자 물리학은 일부과학자들만 알고 있는 원리였기 때문에 “실상은 무상이고” 라는 말은 허망한 말로 들리고 나와는 무관한 딴 세상 얘기로만 인식되었다. 좀 이해가 된다면, 얼음이 물이되고 수증기가 되듯이 본질은 같지만 형태가 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럴수도 있겠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우리가 교육받은 과학적 사고 방식은 전제가 필수적이다. 이는 인간이 한번에 사고할 수 있는데 활용할 수 있는 두뇌의 영역이 비교적 넓지 못하게 제한적인데 근거하기도 하고 우주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에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려면 시작점이 있어야 하는 논리구조 자체의 결함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유한한 방식으로 무한함을 판단할 수 있느냐의 철학적 근거에 따라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규칙이 온전할 수도 있고 모두가 결함 투성이의 원리일 수 있다.
그래도 현재의 수준은 과학적인 근거라는 것이 현재 인간세계에는 공유하기에 좋은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도이다.
양자물리학은 인간의 인식영역을 획기적으로 넓여 놓았다. 양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중.고등학교 수준의 과학에서 에너지 공식과 전자 공식 사이에서 의구심을 가질만한데 이 문제도 아직까지는 기존 과학적사고방식에서는 명쾌한 해답을 구하기 못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에너지가 물질이 될 수도 있는 현상은 과학적인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원리는 아무도 모든다. 단지 현대 과학은 이련현상을 산업화로 실생활에 활용하는 것으로 혜택을 보는 정도이다. 혜택을 본다고 해서 인간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는 될 수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질은 실상이고, 에너지는 무상인가?
대부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렇지 않을 수도 있다.
깊이 파서 지칠 때는 멀리 물러나 보는 것도 방편이다.
우리가 문헌에 기록된 부처로 알고 있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이를 믿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처가 깨닫음에 도달하는 수행과정은 그가 남긴 아주 중요한 힌트다. 6년의 고행 후에 마지막에 깨닫음을 얻는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질은 볼 수 있으려면, 기존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국한된 세상만을 보도록 틀에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이를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부처가 깨닫은 후에 평생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과정에 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자는 몇마디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은 평생을 설명한다고 이해될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를 시키는 과정에도 단계를 두어야 하고, 모두가 그런 오랜 과정을 거쳐 깨닫음을 얻으면, 이상적인 세계가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려면, 생명이 영속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고, …..
“실상은 무상이고”라는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토록 거쳐야할 과정이 있는데, 깨닫음을 얻은 자는 우리보다 시간이 길기 때문에 급할 필요가 없지만, 천천히 할 필요도 없으므로 오랜 길을 나눠 설명하고 궁금증은 그자체로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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